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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운대’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 부산백병원 신경정신과 정도운

백병원이야기 2010. 7. 2. 11:27

영화 ‘해운대’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부산백병원 신경정신과 정도운

 

 

영화 ‘해운대’는 누적 관객수 1174만 명으로 ‘괴물’,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어 한국영화 흥행 순위에서 4위를 기록하며,

2009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다. 자연재해를 다룬 헐리우드 영화들이 많지만, 영화 ‘해운대’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에게 너

무나 친숙한 곳이 지진해일로 파괴되는 것을 그대로 찍은 것 같은 자연스러운 장면들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당하는 재난을

사실처럼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 온난화와 이상기후 현상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러한 자연재난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 쉽게 공감할 수 있고, 미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해운대라는 배경 때문에 관객들에게 더

현실적으로 다가 갈 수 있었다.

 

영화 ‘해운대’에서와 같이 대규모 자연재해를 겪은 후 생존한 사람들에게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으며, 일부는 질병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질병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이다. 영화 ‘해운대’에서 몇 년 전 인도양에서 쓰나미에 휩쓸렸던 만식(

설경구)은 함께 있었던 연희(하지원)의 아버지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느낀다. 영화의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만약 만식(

설경구)이 자책감을 느끼는 정도를 넘어서 극심한 공포, 무력감, 우울, 사고에 대한 반복적이고 고통스러운 회상이나 꿈, 사고와 관련

된 장소나 사람을 피하는 증상이 있었다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진단할 수 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전쟁, 대구 지하철 화재와 같은 사고, 쓰촨 지진과 같은 자연재앙, 직접적인 폭행이나 유괴, 성폭행과 같은

폭력 등 생명을 위협하는 충격적인 경험을 겪은 후에 나타나는 불안장애이다. 심각한 외상을 겪은 후 3~58%의 사람들에게서 이 질병

이 나타난다.

 


베트남 참전 군인의 30%, 쓰촨 지진으로 피해가 심했던 지역에서는 38~46%, 피해가 덜 심한 지역에서는 9~13%의 생존자들에게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나타났다는 연구조사가 있다.


쓰촨 지진 생존자들 중에 노인, 여자, 심한 부상을 입은 경우, 가족이 사망한 경우, 사망자를 직접 목격한 경우에 ‘외상후 스트레스 장

애’로 발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또한 정신과적 질환이 발생하지는 않더라도 다양한 증상과 신체적 질병이 발생할 수 있다.

한 예로, 쓰촨 지역의 중학교 여학생 중 76%가 지진 경험 이후 생리불순이 생겼다고 한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은 사건 경험 후 대개 3개월 이내에 나타나지만, 몇 년 후에 나타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증상이

변화하며,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악화된다.

 

외상이 반드시 불행한 질병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외상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사람의 경우 ‘외상후 성장’이라고 부르는 정신적

성숙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외상후 성장’에는 외상 이전에 그 사람의 성격적 특성이 어떠했는지도 영향을 주지만, 사고 후 얼마나

적절한 치료와 사회적 지지체계가 제공되는 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따라서, 외상을 경험한 이후의 치료적 개입이 향후 나타날 다양

한 증상과 질병을 예방하고 고통을 경감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치료는 앞서 설명한 질병의 특징적인 증상 뿐만 아니라 불안, 우울감 등을 치료하기 위해 항우울제 등의 약

물치료를 하며, 외상적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한 정신역동적 정신치료, 행동치료, 인지치료 등을 한다. 최근에는 EMDR이라는 치료기법

도 사용된다.

 


적절한 치료를 받은 경우 30%에서 완전히 회복되며, 40%는 치료 이전보다 훨씬 나아진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호전되느냐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다양한데, 사건의 심각도, 어떤 증상들이 얼마

나 심하게 생기는 지, 증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 지, 질병이 생기기 전에 그 사람의 기능수준이 어떠했는지, 사회적 지지체계로부

터 얼마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 다른 신체적 또는 정신적 질병이 동반되었는 지 등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잊고 지나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재해나 사고 발생 후에 인명구조를 위해 노력하는 구조대원들이다. 흔히 이들

의 헌신적인 노력을 직업적인 업무로 치부해 버리기 쉬우나 구조대원들 역시 인간이며 그들도 사고 현장에서의 처참함을 목격함으로

인해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정신적 질병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미국에서 있었던 9/11 사고 후 인명구조에 참여했던 구조대원들에

게서 다른 지역의 구조대원보다 더 많은 불안, 불면, 우울감, 급성 스트레스 등이 나타났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체계적이고 지

속적인 사회적 지지와 예방적 조치들이 필요하다.

 

인류가 이 땅에 생긴 이래로 자연재해, 전쟁, 사고 등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어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인류와 땔 수 없는 질병으로 질긴 인연을 이어갈 것이다. 일생을 살다 보면 우리 이웃 중 누군가는 이 질병과 조우할 것이다.

그런 불행을 만난다면 빠르고 적절한 치료적 개입만이 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