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건강정보

[전문의 칼럼] ‘더 글로리’와 정신건강 | 인제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교수 이승환 교수

백병원이야기 2023. 4. 18. 09:09

[전문의 칼럼]  ‘더 글로리’와 정신건강

글: 인제대학교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교수 이승환 교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는 우리나라 교육 현장인 중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학폭의 현실을 실감 나게 그려냈다. 드라마 내용이 학폭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상호 관계에서 일어나는 실상을 너무나도 현실감 있게 보여줬다. 그 속에서 피해자가 느끼는 심리적인 고통과 정신적 증상 등도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드라마 속 가해자 내뱉는 욕과 비속어, 자극적인 장면이 난무해 사실 두 눈 바로 뜨고 보기 힘든 장면도 여럿 있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아내도 정주행할 만큼 이 드라마가 이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이 드라마가 주는 메시지는 다양할 수 있다. 정신건강 전문가인 나로서는 학폭 피해자가 토로해 내는 아픔과 스스로는 극복할 수 없는, 아니 아무리 노력해도 고쳐지지 않는 사회구조적 모순 속에서 학폭 피해자가 홀로 견뎌 내야만 하는 외로움을 동시대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청자가 공감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2023년 발표된 교육부와 질병 관리청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작년 우리나라 중고생의 음주율(한 달에 술 한잔 이상)이 2021년 코로나 시기에 10.7%로 주춤하다가 2022년 13%로 증가했다. 최근 1년간 우울 증상(2주 내내 일상 생활을 중단할 정도로 슬프거나 절망감을 느꼈음)이 있다고 응답한 학생은 28.7%로, 2013년 30.9%를 보고한 이래 가장 높다.

특히 여학생 33.5% 즉, 여학생 3명 중 1명이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남학생이 보고한 24.2%와 큰 차이를 보였다. 그밖에 ‘외로움 경험률’(남학생 13.9%, 여학생 21.6%), 중등도 이상 ‘범불안장애 경험률’(남학생 9.7%, 여학생 15.9)등의 정신건강 지표도 여학생들이 더욱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 이후 등교가 중단되면서 주춤했던 학교에서 발생하는 정신건강상의 문제는 2022년 5월부터 다시 등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이후 다시 최고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 간의 만남과 상호작용이 늘어나면서 학폭도 자연스럽게 늘어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즐거워야 할 학창 시절이 폭력과 굴종으로 얼룩지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폭 피해를 본 학생들은 자존감이 매우 낮아지고, 우울감과 불안,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무감동, 그리고 타인과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적절하게 공감 능력도 감소한다. 이들은 만성적인 자살 사고를 하게 되기 쉽고, 이에 따라 성인이 돼도 건강한 대인관계 형성이 어려워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렵게 된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송혜교 분)은 학폭의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서도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자신의 정신적인 고통을 참고 견디며 복수를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어느 정도 사회적인 생활을 이어가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사실은 불가능에 가까운 설정이다.

임상 현장에서 학폭의 피해로 진료받는 많은 환자 중에 이런 정도의 사회적 기능을 보이는 환자는 거의 없다. 이 드라마는 이런 불가능한 상황과 현실 속에서 학폭 피해자가 학폭 가해자들에게 시원한 복수를 한다는 점이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고 학폭 피해자들은 어두운 터널에 갇힌 것처럼 자존감 저하, 우울과 불안, 자살사고 등 만성적인 증상을 평생 가지고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문제는 실제로 학폭을 당하더라도 주변 동료, 친구, 선생님 그리고 가족들이 이 사실을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이런 것이 우리 대한민국 사회와 교육 현실의 비극이다. 어떻게 우리의 자녀, 우리 가족, 내 친구가 폭력에 희생되고 이로 인해 정신건강이 무너지고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또 모른 척 할 수 있단 말인가?

모른 척하는 이유는 많다. 같은 폭력을 나도 당할까 봐 두렵기도 하고, 학생들의 문제를 부각시켜 학부모에게 시달리기 싫어서 일 수도 있다. 우리 학교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없다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을 수도 있다. 내 자녀가 학교에서 맞고 다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가 어디에 있든 자기가 보고 싶은 상황만 유리하게 보고 있는 우리 모두 학폭이라는 사회적 이슈에 손을 놓고 방관하는 방관자들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20년 전부터 학폭과 왕따가 마치 독버섯처럼 청소년 정신건강의 심각한 위해 요인이며, 학폭과 왕따를 경험한 청소년들은 성인이 돼서도 정신건강을 망친 상태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이러한 문제를 간과하고 방치해 둬서는 안 될 것이다. 학폭 피해자들을 돌보고 보호하고 예방하는 일을 개인의 사적영역으로 놔둘 수 없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런 학폭을 예방하고, 학폭 피해자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상처를 보듬어 주는 행정적 노력과 행동들이 공적영역에서 절실히 요구된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밝고 아름다운 학창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우리가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 그들이 경험하는 즐겁고 학창 시절의 건강한 관계가 아름답고 풍요로운 대한민국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초석이라고 생각한다.